Outdoor Exhibition
야외전시박물관 앞 뒤뜰에 마련된 전시장에 탑, 불상, 비석, 석조 등많은 석조유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부여석조(扶餘石槽)Buyeoseokjo(Stone lotus bowl of Buyeo)
석조는 장방형 또는 원형의 돌 내부를 파내어, 절 등에서 물을 저장하는 용도로 쓰던 석조물입니다. 부여석조로 알려진 이 석조는 원래 있던 장소가 백제의 왕궁터로 전해지고 있으며, 백제인의 미감을 살린 형태나 세부 표현 기법으로 보아 백제 왕궁에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아울러 석조 표면에 새겨진 글의 내용이 부여 정림사터 오층석탑 1층 탑신에 새겨진 것과 같은 당나라가 백제를 평정하였다는 것이어서 그러한 추정을 뒷받침 해주고 있습니다. 당유인원기공비(唐劉仁願紀功碑)Dangyuinwongigongbi(Monument to Liu jen-yuan)
660년 나당연합군 일원으로 백제를 침공한 당나라 장수 유인원(?~?)의 행적을 기록한 비로, 원래 부소산 중턱에 있었던 것입니다. 행적을 기록한 몸돌(비신)과 용 6마리가 새겨진 머릿돌(이수)를 한 돌로 제작한 전형적인 당나라 비석입니다. 거북 형태의 비 받침이 별도로 제작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현재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비록 유인원의 행적을 중심으로 기록한 비이기는 하지만, 의자왕과 태자, 신하 700여 명이 당나라로 압송된 사실과 부흥운동의 주요 내용, 폐허가 된 도성의 모습 등이 기록되어 있어 백제 멸망 과정과 부흥운동의 양상을 알려주는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승탑 부도(僧塔)란?
승탑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는 불탑과 달리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모신 석조물을 뜻합니다. 승탑을 부도가 탑을 의미하는 Stupa를 음역한 부도라고도 부르기도 합니다. 9세기 이후 자기 스승의 법통을 잇는 것을 매우 중요시 여겼던 선종의 유입과 확산과 더불어 승탑이 조성되기 시작합니다. 초기 승탑은 기단, 탑신, 상륜부로 이루어져 있고 각각의 부재가 팔각형을 띤 소위 팔각원당형을 띄고 있습니다. 고려시대 이후에는 이러한 팔각원당형 뿐만 아니라 원구형, 방형, 석종형 등 다양한 형태의 승탑이 조성되었습니다. 박물관석조여래입상(博物館石造如來立像)Bangmulgwanseokjoyeoraeipsang(Standing stone buddha statue)
부여군 부여읍 금성산의 천왕사로 알려진 절터 부근에서 1933년에 발견된 불상입니다. 얼굴은 크고 비만하게 표현만 반면 신체는 밋밋하게 표현하였으며, 특히 몸과 머리의 폭이 거의 비슷한 돌기둥 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렇게 석주형의 석불은 논산 관촉사 석조보살입상, 당진 안국사지 석불입상, 익산 고도리 석불입상 등 고려 전기 충청·전라지역에서 유행하는데 이 석불 역시 그러한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사료됩니다. 오층석탑Dongnam-ri seoktap(Stone pagoda in Dongnam-ri)
석탑은 돌로 만든 탑파라는 의미의 석조탑파를 줄인 말인데, 탑파는 부처의 유골[진신사리]을 묻은 무덤을 뜻합니다. 이 석탑은 부여 석목리 논절마을의 한 절터에서 박물관으로 옮긴 것입니다. 2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쌓은 5층석탑인데, 현재는 기단 일부와 4층 탑신이 없어진 상태입니다. 동남리석탑은 2층 기단과 다층의 탑신으로 이루어진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석탑을 계승하면서도, 탑신의 폭에 비해 높이가 높은 전형적인 고려시대 석탑의 모습을 띄고 있습니다. 보광사대보광선사비(普光寺大普光禪寺碑)Bogwangsadaebogwagseonsabi(Stele to Nation Preceptor Wonmyeong of Bogwang-sa Temple)
원래 부여군 임천면 성주산 보광사터에 있던 것으로, 보광사 중창을 주도한 원명국사 충감(1275~1339)의 행적과 중창 과정을 기록한 비입니다. 충감은 선원사 출신으로 원나라에 유학까지 다녀온 이름난 선승이었는데, 말년인 1336년 개경을 떠나 보광사로 들어온 이후 보광사가 크게 중창시켰다고 합니다. 비문은 당시 문장으로 이름을 떨치던 원나라 사람 위소가 짓고, 원나라 사람 양지와 주백기가 각각 비문과 전액(전서체로 쓴 비의 이름)을 썼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글씨가 마멸되어 알아볼 수 없게 되자 1750년 보광사의 주지였던 능일이 글씨를 다시 새겨 넣었습니다. 이 비석은 비 받침과 모난 형태의 몸돌로만 이루어진 고려후기 비석의 전형적인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동사리석탑(東寺里石塔)Dongsariseotap(Stone pagoda in Dongsa-ri)
원래 부여군 세도면 동사리에 있던 것을 1971년 부여읍 쌍북리로 옮겼다가 1993년에 다시 박물관으로 옮겨 세웠습니다. 석탑은 2층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쌓은 구조입니다. 아래층 기단 네 면에 각각 3개씩의 안상을 새겨 장식하였습니다. 위층 기단 덮개돌(상층기단 갑석)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긴 탑신받침이 있으며, 네 모서리에는 돌출된 꽃장식이 있습니다. 탑신은 1층 탑신에 비해 2층 탑신부터는 급격히 작아졌습니다. 1층 탑신에는 네모난 구멍을 뚫었는데, 불상 등을 안치하기 위한 감실의 일종입니다. 이 석탑은 연꽃무늬 탑신 받침이나 2층 탑신 이상의 급격한 축소, 탑신에 새긴 감실 등은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면서 단정함을 잃지 않은 것으로 보아 고려전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성주사지 출토 비머리(螭首)Monument Top Stone
비석의 머릿돌은 용이 새겨져 있어 이수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모습의 이수는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 확립되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영향을 받아 신라의 통일 직후 귀부, 몸돌, 이수로 이루어진 비석을 만드는데, 비신과 별도로 만들어진 우리나라의 이수와 달리 중국의 이수는 비신과 한 몸을 이루는 것이 특징입니다.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인 보령 성주사터에서 발견된 이 비석머리는 특이하게도 반룡들이 서로 얽힌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고 비석의 이름을 적는 제액이 원형으로 되어 있는 특이한 형태을 띄고 있습니다. 성주사지에는 888년 입적한 무염의 비석이 남아 있고 이수의 구성과 제액의 형태가 변형된 것으로 고려시대 성주사에 주석하였던 선사의 비석머리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비석받침(龜趺)Tortoise-Shaped Monument Stele Base
중국 당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비석의 받침은 거북모양을 띠고 귀부라고 불러지고 있습니다. 태종무열왕릉비와 같이 초창기 비석의 귀부는 전형적인 거북머리를 하고 있지만 9세기 중엽 이후부터는 용머리로 변모합니다. 보령 성주사터에서 나온 비석머리와 하나의 세트를 이루고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 비석받침은 머리와 몸의 일부가 없지만, 다리와 등 모양이 사실감과 박진감을 느낄 수 있는 뛰어난 작품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