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전시실
제2전시실
제3전시실
기증유물실
제1전시실
송국리 문화와 부여의 철기문화 한반도에 청동기문화가 무르익고 있을 무렵, 부여 송국리에서는 새로운 문화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부여 송국리 사람들은 이곳에 마을을 형성하였습니다. 마을 주변에는 외부로부터 침입을 막기 위해 도랑을 파고, 목책을 둘러 마을을 보호하였습니다. 송국리 사람들은 둥근 원형의 집 내부에 타원형의 구덩이가 있고, 기둥을 세웠습니다. 이러한 형태의 집들은 송국리형 문화를 가지고 있는 유적들에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송국리의 마을 부근에서는 판돌을 이용하여 만든 돌널무덤이 확인되었습니다. 그 안에서는 비파형동검과 돌칼, 돌화살촉 그리고 옥을 만든 대롱옥과 곱은옥이 발견되었습니다. 출토유물들을 통해 주인공이 송국리 마을의 최고 권력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돌널무덤과 함께 독무덤이 발견되었습니다. 독무덤의 특징은 실생활에서 사용되고 있는 '송국리형 토기' 아가리가 밖으로 벌어진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이 토기는 원형의 집자리와 함께 송국리형 문화를 대표하는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송국리 사람들이 무엇을 먹었는지 알려주는 증거들이 있습니다. 탄화미는 당시 농경 생활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삼각형 돌칼 등은 곡식들을 거둬들일 때 사용하던 것입니다. 철기가 도입되어도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전까지 청동기는 여전히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청동기시대의 비파형동검은 폭이 더 좁고 날렵한 한국식동검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청동기시대에 보이지 않던 나무에 끼워 사용하는 꺽창도 만들어졌습니다. 철기의 도입으로 생활전반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충청도 지역에서도 철로 만든 도끼와 끌 등의 도구들이 확인되어 철기문화가 도입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의 변화는 단순히 금속의 변화만이 아닙니다. 이전의 무문토기는 서서히 그릇의 형태가 변하여 아가리에 점토띠를 붙이거나 표면을 붉게 또는 검게 마연한 것이 등장합니다. 철기가 본격적으로 사용되면서 토기를 만드는 다양한 기법들을도입하게 됩니다. 타날기법과 물레나 가마를 사용하는 기술 등이 도입되면서 무문토기들은 점차 단단한 토기들로 발전하게 됩니다. 중국의 역사기록을 보면, 마한사람들은 "구슬을 귀중하게 여겨서 옷에 꿰어 차기도 하고," "또는 머리를 장식하거나 귀에 달기도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실제 이 시기의 유적에서는 많은 양의 옥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마한의 풍습으로는 농경생활과 관련된 제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해마다 5월에 씨뿌리는 작업을 마친 뒤, 무리지어 노래하고 춤추면서 신에게 제사지낸다." "10월에 이르러 추수를 마친 뒤에도 역시 그렇게 한다." 라고 한 내용은 실제 부여 논치 유적에서 제사 관련 흔적들이 발견되어 이 기록이 사실임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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